Ex) Article Title, Author, Key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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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Medical Society of Soft Tissue 2021; 5(1): 51-59
Published online October 30, 2021 https://doi.org/10.54461/JKMST.2021.5.1.51
Copyright © Korean Medical Society of Acupotomology.
Jongwon Woo1 , Soyoun Choi1
, Dong-yeon Kim1
, Heewon Yang1
, Donghyun Kim1
, Seonghyun Kwak1
, Sungmin Kim1
, Hagdong Kim2
Correspondence to:Hagdong Kim
Kim Hagdong Korean Medicine Clinic, 102/104, 3, Jungheung-ro 255beon-gil, Buk-gu, Pohang 37749, Korea
Tel: +82-54-278-7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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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Korean medicine and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TCM) have been mistaken for not having anatomical knowledge but only accepting abstract ideas for Eastern philosophy. However, they were also developed based on anatomy through actual observations. The goal of this paper is to state that they have independent history of anatomy.
Methods: Several medical classics of ancient times to Ming (明)-dynasty were reviewed for investigating independent history of anatomy in Korean medicine.
Results: There remain records of anatomy in Hwangjenaekyung (黃帝內經), nankyungjipju (難經集註), ryeossichu (呂氏春秋). Also, we can identify specific details that they would not have known if they had not done dissect. For example, the size, diameter, weight, capacity, shape, location of the organs. Surgery that is requiring basic anatomical knowledge has also been performed, such as surgery when the disease is in organs, operative wound closure, and records of surgery to release pathological material. In addition, zangfutu (臟 腑圖) implies that dissection was done in the East.
Conclusion: The anatomy of the East is historically different from that of the West. However, in the East, the human body was also observed based on anatomical thinking. Korean medicine also developed based on this observation.
KeywordsKorean medicine,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Medical history, Anatomy, Zangfutu (臟腑圖)
과학은 일반적으로 연역과 귀납의 과정을 통해 성립되며 발전되어왔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어떠한 현상에 대하여 관찰함으로써 각각의 현상을 관통하는 일반적 이론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또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을 때에는 귀납의 결과로 도출된 일반적 전제를 통해 해당 현상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새로운 사실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귀납이 먼저인가 연역이 먼저인가에 대해서는 수 많은 논쟁이 있겠으나, 경험적 관찰이 과학의 기원적 측면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의학에서 경험적 관찰이 두드러지는 학문 중 하나가 해부학일 것이다. 해부학은 생물의 구조를 탐구하는 실증적 학문으로, 특히 육안 해부학(Gross Anatomy)에 있어서는 인체 내외를 직접 해체하고 관찰하는 것이 주요 탐구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고대 이집트의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를 인체 구조에 대한 경험적 관찰의 최초 기록으로 보는데, 여기에는 두개골 봉합선, 뇌척수막, 뇌척수액, 심혈관계의 구조에 관한 묘사가 기록되어 있다1,2). 이후 아리스토텔레스가 태아를 관찰하여 심장, 허파, 소화기관 등의 장기에 관하여 기술하였으며3), 갈레노스, 베살리우스 등 실제 인간 및 동물을 해부하여 도해한 학자들을 거쳐 현대 해부학까지 발전해왔다.
그런데, 한의학 및 중의학 역시 위와 같은 실증적 관찰에 의한 해부학의 발전이 이루어져 왔음에도 이러한 발전 과정이 없는 것처럼 오해를 받고 있으며, 심지어는 한의학이 마치 동양철학의 추상적 사유만을 받아들였다고 오인되기도 한다. 본 고에서는 한의학 및 중의학에서 인체를 경험적으로 관찰하여 기록하여 왔던 부분을 밝혀 한의학 역시 실증적인 관찰과 함께 발전한 학문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본 고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해부에 관한 기록, 외과 수술 기록, 장부도의 변천사 세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논하고자 하였다. 또한,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으로 평가되는 淸代 이후보다는 明代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하여 한의학에 있어서의 독자적인 해부학의 역사에 대해 밝히고자 하였다4).
한의학에서 해부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黃帝內經 靈樞』에 “무릇 팔 척의 사람은 피육에서 이것을 살필 수 있으니, 밖으로는 헤아려 누르고 만져서 이를 얻을 수 있다. 그가 죽으면 해부하여 이를 볼 수 있다. 오장의 딱딱함과 부드러움, 육부의 크고 작음, 먹은 곡식의 다소, 경맥의 장단, 혈의 청탁, 기의 다소 ...... 모두 대강의 정도 (어림수)가 있다.”5)[1]라 하여 아주 오래전에 해부를 통해 인체의 내부를 살펴보았다는 기록이 있다6). 『難經集註』에서 역시 “월인은 桑君의 비술을 전수받아, 의도에 통달하고 장부를 투시하여 장을 절제하고, 심장을 적출할 수 있게까지 이르렀다. 그 기술은 軒轅 때의 扁鵲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7)[2]이라 하여 진월인 역시 해부를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8). 또한, 『呂氏春秋』 「貴直論」에 ““商나라의 주왕은 걸어 다닌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려 그 골수를 보았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보았으며 비간(比干)을 죽여 그 심방을 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9), 漢代에는 “왕망이 적의의 무리였던 자가 체포되자 태의를 시켜 그를 해부하여 오장의 길이와 무게를 측정하게 하였고, 대나무를 혈맥을 따라 넣어 그 시작과 끝을 측정하여 ‘이것으로 병의 치법을 알 수 있다’하였다”[3]라 하여 왕망(王莽)이 해부를 명한 기록이 남아있다10).
이러한 기록은 단지 “해부를 시행했다는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인체에 대한 여러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실제로 해부를 하지 않았다면 알기 어려울 만큼 구체적인 내용들 역시 존재한다. 특히, 장기의 크기, 직경, 무게, 용량 등의 수치를 기록한 부분들이 그러하다. 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221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黃帝內經 靈樞』의 「平人絶穀」에서는 내장기의 크기(둘레), 직경, 길이, 용량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6,11). 이후 後漢時代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黃帝八十一難經』에서 역시 「平人絶穀」의 내용을 언급하며 『內經』에는 없는 五臟六腑의 계측 값에 대하여 보충하였는데 『內經』과 『難經』의 내용을 정리한 내용과 이를 당대 도량형으로 변환한 값은 Table 1과 같다.
Table 1 『內經』과 『難經』에서 五臟六腑의 계측 값과 변환값[6]
길이 | 둘레 | 직경 | 폭 | 용량 | 무게 | 위치 및 모양 | |
---|---|---|---|---|---|---|---|
간 | 二斤四兩 [7,8] (277.68 g) | 左三葉 右四葉 | |||||
심 | 精汁三合 (60 ml) | 十二兩 (167.04 g) | 七竅 三毛 | ||||
비 | 五寸 (11.55 cm) | 三寸 (6.93 cm) | 二斤二兩 (499.68 g) | ||||
폐 | 三斤三兩 (707.76 g) | 六葉兩耳 | |||||
신 | 一斤一兩 (235.92 g) | 兩枚 | |||||
담 | 三兩三銖 (43.5 g) | 肝之短葉間 | |||||
위 | 二尺六寸 (60.06 cm) | 一尺五寸 (34.65 cm) | 五寸 (11.55 cm) | 穀二斗 (4,000 ml) 水一斗五升 (3,000 ml) | 二斤二兩 (471.84 g) | ||
소장 | 三丈二尺 (739.2 cm) | 八分分之少半 (1.925 cm) | 二寸半 (5.775 cm) | 穀二斗四升 (4,800 ml) 水六升三合合之大半 (1,273.33 ml) | 二斤十四兩 (638.88 g) | 左回疊積十六曲 | |
대장 | 二丈一尺 (485.1 cm) | 一寸 (2.31 cm) | 四寸 (9.24 cm) | 穀一斗 (2,000 ml) 水七升半 (1,500 ml) | 二斤十二兩 (611.04 g) | 齊右回十六曲 | |
방광 | 九升九合 (1,980 ml) | 九兩二銖 (126.44 g) |
한편, 元代 朱震亨의 『格致餘論』에서는 “음양이 서로 얽혀 잉태되어 결합되면 그것이 저장되어지는 곳을 ‘자궁’이라 한다. 아래에 묶여진 한 줄기가 있고, 그것이 위로 갈라져 왼쪽, 오른쪽 각각 하나씩 달한다.”[4]라고 하여 자궁의 생김새를 정확하게 묘사하였다12). 明代 李梴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醫學入門』에서도 『存眞圖』와 『內照圖』의 해부학적 지식을 일부 수용 및 수정하여 『黃帝內經』의 五臟系 개념을 발전시켰다. 정혁상 등은 李梴이 실제로 해부에 관여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醫學入門』에 기술된 五臟系를 현대 해부학적으로 고찰한 결과 상당수의 系가 혈관계통(주로 동맥)을 관찰한 것으로 보이며, 그 외에도 기관 및 기관지, 인대, 장간막 등 다양한 구조물을 관찰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였다13).
한편, 우리나라에서 서양의학이 유입되기 전 해부를 시행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나타난다. 1559년 임언국의 『治腫秘方』 중 「背腫」에서는 직접 해부를 수행하였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심장의 뿌리는 5추 안에 매달려 있으니, 곧 (독맥 상) 피부에서 일 촌 떨어져 있을 따름이다.”14)[5]라 하여 심장의 정확한 해부학적 위치를 적시하였다15). 이익의 『星湖僿說』의 「五臟圖下」에 따르면, 의술에 밝은 전유형은 임진왜란때 길가에 있는 시체 3구를 해부하였고 그 방면에 더욱 정통해졌다는 것이 기록 되어있다. 다만 전유형은 유능한 의사로 기록이 전해졌지만 그의 해부학적 지식이 담긴 책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다16).
여러 의서를 찾아보면, 옛날에 외과 수술을 수행했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외과 수술을 수행한 경우는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로는 병이 臟腑에 있을 때 이를 직접 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진행한 기록이 있다. 『史記 扁鵲列傳』에는 “유부(俞跗)라는 의사가 탕액예쇄(湯液醴灑), 참석(鑱石), 교인(撟引), 안올독위(案扤毒熨) 등의 방법을 쓰지 않고 옷을 풀어 헤 쳐서 잠시 진찰해 보는 것만으로 질병의 징후를 보았고, 오장에 있는 수혈의 모양에 따라 피부를 가르고 살을 열어 막힌 맥을 통하게 하고 끊어진 힘줄을 잇고, 척수와 뇌수를 누르고, 고황과 격막을 바로하고, 장과 위를 깨끗이 씻어내고 오장도 씻었다.”17)[9]라 하여 외과적인 수술을 수행한 기록이 남아있다18). 화타 역시 “만약 병이 속에서 뭉치고 오래 되어 침을 놓는 것과 약을 쓰는 것으로 미칠 수 없어서, 마땅히 바로 수술을 해야 할 경우는 곧 그에게 마비산(麻痺散)을 마시게 하여, 잠시 후에 취해서 죽은 듯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게 되어서야 갈라서 수술했다. 만약 병이 내장 속에 있으면 곧 내장을 갈라 씻어 빨고, 배를 꿰맨 뒤 연고를 바르고 4-5일이면 나아서 아프지 않았으며, 환자도 느끼지 못해서 한 달이면 곧 평상시와 같이 회복되었다.”19)[10]라 하여 마취를 이용한 개복 수술을 진행한 기록이 남아있다20).
둘째로는 창상을 봉합하기 위하여 수술을 수행한 기록이 있다. 隨代 巢元方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諸病源候論』에는 “쇠붙이에 상하여 내장이 끊어졌을 때는 상처의 깊이에 따라 생사가 정해진다. 내장이 한쪽 끝만 보이면 이을 수 없다. 배가 아프고 숨이 짧으며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때 대장으로 인한 것이면 하루 반이 지나 죽고, 소장으로 인한 것이면 3일 만에 죽는다. 내장의 양끝이 보이면 급히 이을 수 있으니 먼저 바늘과 실로 꿰매어 잇는다. 내장이 끊어졌을 때는 닭 벼슬에서 나온 피를 끊어진 곳에 발라 기가 새지 않게 하고 밀어 넣는다. 내장이 나오기만 하고 끊어지지 않았을 때는 보리죽의 국물로 내장을 씻고 적셔서 넣는다.”21)[11]라 하여 창상으로 인해 내장이 끊어진 경우 이를 잇는 수술법을 소개하고 있다22). 또한, 元代 危亦林이 저술한 『世醫得效方』에서는 “창자와 뱃가죽이 터진 경우 마를 실로 만들거나 상백피를 실로 만들어 화예석산을 실 위에 바르고 안에서부터 꿰매어주고 창자에 청유를 발라 배 안으로 넣어준 후 피부를 꿰매는데 바깥 피부는 꿰매지 말고 열린 채로 두고 약을 발라 새살이 생기기를 기다려야 한다. 뱃가죽이 터져 창자와 장간막이 모두 나온 경우 먼저 활혈산이나 불수산과 같은 탕약을 먼저 복용케 하고 손을 써서 장간막을 뜯어버린다. 이는 쓸데없으므로 마음 놓고 없애도 된다. 그런 후에 창자를 안으로 넣은 후 실을 써서 봉합하고 이어 대소변이 잘 나가게 하는 약을 복용하여 대소변이 막히지않도록 한다.”23)[12]라 하여 내장이 찢어진 경우에 치료하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24).
셋째로는 인체 내부의 병리적인 물질을 배출하기 위하여 수술을 수행한 기록이 있다. 『東醫寶鑑』에서는 “나의 친척 부인이 나이 70에 유옹이 생겨 침도를 이용하여 외과치료를 하였더니...”[13]라 하여 침과 칼로 유옹을 치료한 경험을 기술한 『鍼灸資生經』의 내용을 인용하였다25). 또한, 『治腫指南』에서는 附骨疽를 치료할 때에 “부골저가 처음 생겨서 아플 때에는 그곳을 침으로 찢어내고 쇄골을 빼내어 모두 제거한다. 침으로 제거한 후...”[14]라 하여 침을 통해 인체 내부의 뼛조각을 먼저 빼내어야 함을 제시하였다26).
위와 같은 외과수술은 실제 인체 구조를 알지 못한다면 행할 수 없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 수준의 해부학적 지식이 당대에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또한 동시에 수술 시의 개복을 통한 실제 장기 및 조직의 관찰이 이루어져 해부에 관한 학문적 발전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체 해부의 결과를 도해하여 나타낸 그림 역시 여러 시대에 걸쳐 전해지고 있다. 중국 五代시대(907-960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煙蘿子內境圖』는 『正統道 藏・修眞十書・雜著捷徑』에 총 6폭이 수록되어 있다. 內境(內景, 內照)은 도교에서 血肉筋骨臟腑의 象이라고 하여 그 명칭이 인체 내부를 그렸음을 나타내고 있다. 煙蘿子內境圖에는 五臟, 泥丸, 丹田, 三魂, 三尸, 七魄, 臍, 羊車, 鹿車, 牛車 그리고 飮龜 등의 그림이 표현되어 있다. 6폭의 煙蘿圖의 해석으로는 김학동 등[15]과 성민규 등이 「內境正面之圖」, 「內境背面之圖」 가 해부학적 인체도와 가깝다고 평하였으며, 「內境左側之圖」, 「內境 右側之圖」 등의 나머지 4폭은 道敎와 관련이 있다 하였다27,28,30).
도교는 여러 수련 방법을 통해 神仙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神仙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곧 不老不死, 却病延年을 이루는 것이다. 도가들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활용하였는데, 체내의 精氣神을 돌보는 방법인 內丹도 그 중 한가지이다. 최초의 도교 경전이라고 평가받는 『太平經』에서는 『黃帝內經素問』 「宣明五氣論」편의 “五臟은 저장하고 있는 바, 心은 神을 저장하고, 肺는 魄를 저장하고, 肝은 魂을 저장하고, 脾는 意를 저장하고, 腎은 志를 저장한다. 이를 五臟所藏이라 한다.”[16]를 바탕으로 ‘五臟神’의 개념을 언급하며 도교적 수련방법과 五臟이라는 의학적 개념을 연결지었고29), 이러한 五臟神개념은 이후 魏晉시대 『黃庭經』에 이르러 五臟存思法[17] 등의 방법으로 더욱 확대, 발전되는 과정을 거치며 內丹術로써 자리잡게 되었다30).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도교에서는 內境圖를 작성함에 있어서 인체 내부의 五臟六腑와 도교적 수련을 위한 五臟神의 개념, 더 나아가 內丹術을 위한 개념까지도 반영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Fig. 1의 「內境正面之圖」, 「內境背面之圖」를 살펴보면 肝과 脾의 위치가 실제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한의학의 해부학이 실증적으로 이루어 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표현한 이유 역시 도가적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림에서 肝이 해부학적 위치(오른쪽)가 아닌 왼쪽에 표현한 것은 오행에 따른 위치(肝은 오행에서 木에 속하여 왼쪽)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는 內丹術, 五臟神의 개념과 이론적 설명을 위해 좌우를 바뀌게 표현한 것이다. 또한 「內境背面之圖」에 몸 중앙을 가로지르는 일직선의 관이 보이는데, 心에서 腎을 거쳐 精竅까지 연결하는 腎系를 나타낸 것으로, 이 장부도가 실제와는 다른 이론적 설명도 내포하고 있음을 뒷받침해준다5,31). 추가적으로 南宋代 『修眞十書』를 편찬한 石泰는 “肝은 木이다. 陰이 아직 물러나지 않고 탄식소리를 듣고 나오는 고로 왼쪽에서 치료하고 오른쪽에 위치한 것이다.”[18]라 하여 肝이 木의 속성을 가져 陰中之陽의 성질을 지녀 치료에서는 좌측으로 배치하였지만, 실제의 위치는 우측이라고 하였다. 즉 간의 위치를 고의적으로 실제와 다르게 그려진 것임을 첨언한 것인데, 이러한 사실은 단지 그림이 동양적 관점에서 그 기능과 성질을 표현하기 위하여 좌우를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 실제로는 장부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5,30).
北宋시대에 만들어진 해부도에는 『歐希範五臟圖』와 『存眞圖』가 있다. 『歐希範五臟圖』는 역적 歐希範과 그 무리를 진압하여 사형수인 이들을 해부하여 내장기를 도해한 결과물로 正面內向圖(前向面圖), 正背圖 (또는 正面圖), 背圖(背面圖), 心肺二臟之圖, 心氣圖, 氣海膈膜圖, 脾胃包系圖, 小腸膀胱蘭門圖, 命門大小腸膀胱之系圖의 9종 등으로 여러 판본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온다31). 『存眞圖』는 楊介가 『歐希範五臟圖』를 수정하고 『煙蘿子內境圖』를 증보 및 발전시킨 것이며 人臟正面圖, 人臟背面圖, 肺側圖, 心氣圖, 氣海膈膜圖, 脾 胃包系圖, 小腸膀胱蘭門圖, 命門大小腸膀胱之系圖의 8종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存眞圖』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후 元代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華佗先生內照圖』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5,28,31). 또한, 『煙蘿子內境圖』에서 바뀐 肝과 脾의 위치는 이후 『歐希範五臟圖』에서 肝과 脾의 모양은 그대로 둔 채로 이름만 바꾸어 위치만 바로잡았고, 『存眞圖』에서 肝과 脾의 위치에 모양까지 바꾸어 실제 해부학적 지식과 일치하도록 하였다31). 이기훈은 『歐希範五臟圖』와 『存眞圖』가 도교적 색채에서 탈피하고 해부학적 사실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후 『類經圖翼』 등에서 나타나는 후세 臟腑圖가 『存眞圖』를 기반으로 발전되었다고 평하였는데, 肝脾에 대한 내용을 수정한 점에서 그러한 면을 엿볼 수 있다고 사료된다32).
『華佗先生內照圖』는 『華佗先生玄門脈訣內照圖』라고도 하며(모두 이하 『內照圖』로 표기) 5-6세기에 漢代 華陀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내용에 宋代 『歐希範五臟圖』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華佗先生內照圖』는 元代에 완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內照圖』에서는 “黃帝書에 말하길 地氣의 통로는 嗌에 있으며 嗌咽이다. 藏象에서는 咽은 喉의 뒤에 있으니 고서가 옳고 구희범의 해장도가 틀리다.”[19]라 하여 “喉가 앞에 있고 咽이 뒤에 있다. 喉는 들이마시는 것을 主하고, 咽은 내뱉을 뿐이다.”[20]라 한 藏象(『煙蘿子內境圖』)의 표현이 옳고 歐本(『歐希範五臟圖』)의 표현이 틀리다고 지적하였다5,18).
또한 『內照圖』의 「人臟正面背面二圖」에서는 “송대의 화공 宋景이 구희범의 해부도를 그릴 때, 喉中에 구멍이 세 개라고 하였으나, 喉中에 구멍이 세 개 있다는 말은 옳지 않다.”[21]라 하여 『歐希範五臟圖』의 해부학적 오류를 지적하고 咽喉의 구조와 기능을 상세하게 후술하였다5).
즉, 장부도는 『煙蘿子內境圖』부터 출발하였으며 이후 후대 의가들의 관찰에 의해 오류를 수정하고 부족함을 보충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본 고에서는 한의학에서 인체를 해부하였다는 기록을 명시하여 한의학의 발전 과정에서 실증적 관찰이 배제되지 않았음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해부, 외과 수술, 장부도의 세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 기록을 중심으로 한국과 중국의 해부학사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서양의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생각되는 淸代부터는 고찰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우선, 중국에서는 정부에서 행해지는 공식적인 행정 절차로서 해부 시행에 관한 내용이 『黃帝內經』, 『呂氏春秋』, 왕망(王莽)의 기록 등에 존재한다. 또한 실제 해부를 시행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인체 내부 구조의 실측치와 모양에 대한 묘사와 같은 기록이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조선의 전유형이 임진왜란 때에 시체 3구를 해부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둘째로, 외과 수술에 관하여서는 장부에 병이 있을 때에 직접 개복 수술을 수행한 기록, 창상 수술 중 장기를 접합한 기록, 옹종 적출 등을 위해 침과 칼을 이용한 기록 등이 남아있다. 이러한 수술이 시행되었다는 것은 당대에 해부학적 지식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며, 동시에 수술 과정 중에서 획득하는 해부학적 지식을 통한 학문적 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인체 해부 결과를 도해한 臟腑圖는 『煙蘿子內境圖』로부터 『歐希範五臟圖』, 『存眞圖』, 『華佗先生內照圖』 등으로 이어져 왔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臟腑圖 역시 변화해 왔는데, 이 변화의 과정 중에는 前代의 오류를 수정하고 새로운 사실을 보충하는 발전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위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였을 때 한의학은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관찰과 함께 발전해온 학문이라고 사료된다.
해부학은 인체의 구조를 알고자 하는 목적에서 출발한 학문이다. 인체에서 발생하는 여러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병인을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인체의 구조와 생리를 탐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동양의학에서도 역시 해부를 시행하였으며, 이는 여러 의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기록을 살펴보면 해부는 왕이 해부를 명령하거나 이를 그림으로 남기도록 명하는 등 관(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식적인 행정 절차로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동양에서 해부가 갖는 의의가 작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백유상 등은 이러한 관에서 수행한 해부에 太醫가 참석했다는 기록(王莽傳)이 있는 것을 근거로 해부에 대한 지식이 수준 높은 지식이었을 것이며, 다수의 의사를 참여시켜 의학적 지식을 보급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아마 이러한 지식이 외과 수술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으로서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33).
그러나, 동양에서 해부가 발전한 경과는 서양과는 상이한 면이 있다. 서양은 인체를 기계적으로 바라보고 각 조직, 기관, 장기의 역할을 개별적으로 분석하는 방향으로 해부학을 발전시켰으며, 해부를 시행할 때에 해부 대상의 생사는 큰 의미가 없었다. 반면, 동양에서는 인체를 작은 단위로 분해하여 탐구하기보다는 하나의 전체로서 인식하였으며, 인체를 사후에 해부하여 그 구조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 그 구조를 生動하게 하는 역학관계(氣)에 중점을 더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4,10,18).
‘生動’을 중시하는 한의학의 이러한 특징은 해부 내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臟腑圖에서 두드러진다. 『煙蘿子內境圖』로부터 이어지는 臟腑圖는 인체 내부의 五臟六腑를 표현한 그림으로 주로 사지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사지말단이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는 서양의 인체도와 비교하면 주목할만한 차이이다. 한봉재에 따르면 이는 한의학이 생명활동의 중심을 장부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34). 또한, 『東醫寶鑑』의 身形臟腑圖에서는 복부의 율동을 주름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호흡하고 있는 모습, 즉 氣가 운행하고 있는 생체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Fig. 2)25,35).
다만, 사지말단이나 근육, 혈관, 신경 등에 관하여 상세하게 기술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비록 권중철 등은 십이경근이 肌腱과 주위 신경 조직을 구분하지 않고 동력원으로서 한꺼번에 기술하였다고 주장하며10), 정혁상 등은 醫學入門의 五臟系가 신경, 혈관, 장간막 등을 관찰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장하였으나13), 한의학에서의 해부학은 주로 장부 위주 해부에 편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 부위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은 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다만, 전신의 침구 치료혈을 위주로 발전한 外景圖인 明堂圖에 관하여 본 고에서는 논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며, 현대의 한의학에서는 오장육부 중심인 고유전통의 해부에서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뇌, 사지말단, 근골격계 등의 문제에도 보다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연구하여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Jongwon Woo: Conceptualization, Data curation, Formal analysis, Investigation, Writing - original draft
Soyoun Choi: Conceptualization, Data curation, Formal analysis, Investigation, Writing - original draft
Dong-yeon Kim: Conceptualization, Data curation, Formal analysis, Investigation
Heewon Yang: Conceptualization, Data curation, Formal analysis, Investigation
Donghyun Kim: Conceptualization, Data curation, Formal analysis, Supervision
Seonghyun Kwak: Formal analysis, Investigation, Supervision
Sungmin Kim: Formal analysis, Investigation, Supervision
Hagdong Kim: Writing - review & editing
The authors declare no conflict of interest.
Journal of Korean Medical Society of Soft Tissue 2021; 5(1): 51-59
Published online October 30, 2021 https://doi.org/10.54461/JKMST.2021.5.1.51
Copyright © Korean Medical Society of Acupotomology.
Jongwon Woo1 , Soyoun Choi1
, Dong-yeon Kim1
, Heewon Yang1
, Donghyun Kim1
, Seonghyun Kwak1
, Sungmin Kim1
, Hagdong Kim2
1College of Korean Medicine, Semyeong Universtity, Jecheon, 2Kim Hagdong Korean Medicine Clinic, Pohang, Korea
Correspondence to:Hagdong Kim
Kim Hagdong Korean Medicine Clinic, 102/104, 3, Jungheung-ro 255beon-gil, Buk-gu, Pohang 37749, Korea
Tel: +82-54-278-7582
Fax: +82-54-278-7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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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Korean medicine and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TCM) have been mistaken for not having anatomical knowledge but only accepting abstract ideas for Eastern philosophy. However, they were also developed based on anatomy through actual observations. The goal of this paper is to state that they have independent history of anatomy.
Methods: Several medical classics of ancient times to Ming (明)-dynasty were reviewed for investigating independent history of anatomy in Korean medicine.
Results: There remain records of anatomy in Hwangjenaekyung (黃帝內經), nankyungjipju (難經集註), ryeossichu (呂氏春秋). Also, we can identify specific details that they would not have known if they had not done dissect. For example, the size, diameter, weight, capacity, shape, location of the organs. Surgery that is requiring basic anatomical knowledge has also been performed, such as surgery when the disease is in organs, operative wound closure, and records of surgery to release pathological material. In addition, zangfutu (臟 腑圖) implies that dissection was done in the East.
Conclusion: The anatomy of the East is historically different from that of the West. However, in the East, the human body was also observed based on anatomical thinking. Korean medicine also developed based on this observation.
Keywords: Korean medicine,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Medical history, Anatomy, Zangfutu (臟腑圖)
과학은 일반적으로 연역과 귀납의 과정을 통해 성립되며 발전되어왔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어떠한 현상에 대하여 관찰함으로써 각각의 현상을 관통하는 일반적 이론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또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을 때에는 귀납의 결과로 도출된 일반적 전제를 통해 해당 현상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새로운 사실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귀납이 먼저인가 연역이 먼저인가에 대해서는 수 많은 논쟁이 있겠으나, 경험적 관찰이 과학의 기원적 측면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의학에서 경험적 관찰이 두드러지는 학문 중 하나가 해부학일 것이다. 해부학은 생물의 구조를 탐구하는 실증적 학문으로, 특히 육안 해부학(Gross Anatomy)에 있어서는 인체 내외를 직접 해체하고 관찰하는 것이 주요 탐구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고대 이집트의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를 인체 구조에 대한 경험적 관찰의 최초 기록으로 보는데, 여기에는 두개골 봉합선, 뇌척수막, 뇌척수액, 심혈관계의 구조에 관한 묘사가 기록되어 있다1,2). 이후 아리스토텔레스가 태아를 관찰하여 심장, 허파, 소화기관 등의 장기에 관하여 기술하였으며3), 갈레노스, 베살리우스 등 실제 인간 및 동물을 해부하여 도해한 학자들을 거쳐 현대 해부학까지 발전해왔다.
그런데, 한의학 및 중의학 역시 위와 같은 실증적 관찰에 의한 해부학의 발전이 이루어져 왔음에도 이러한 발전 과정이 없는 것처럼 오해를 받고 있으며, 심지어는 한의학이 마치 동양철학의 추상적 사유만을 받아들였다고 오인되기도 한다. 본 고에서는 한의학 및 중의학에서 인체를 경험적으로 관찰하여 기록하여 왔던 부분을 밝혀 한의학 역시 실증적인 관찰과 함께 발전한 학문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본 고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해부에 관한 기록, 외과 수술 기록, 장부도의 변천사 세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논하고자 하였다. 또한,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으로 평가되는 淸代 이후보다는 明代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하여 한의학에 있어서의 독자적인 해부학의 역사에 대해 밝히고자 하였다4).
한의학에서 해부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黃帝內經 靈樞』에 “무릇 팔 척의 사람은 피육에서 이것을 살필 수 있으니, 밖으로는 헤아려 누르고 만져서 이를 얻을 수 있다. 그가 죽으면 해부하여 이를 볼 수 있다. 오장의 딱딱함과 부드러움, 육부의 크고 작음, 먹은 곡식의 다소, 경맥의 장단, 혈의 청탁, 기의 다소 ...... 모두 대강의 정도 (어림수)가 있다.”5)[1]라 하여 아주 오래전에 해부를 통해 인체의 내부를 살펴보았다는 기록이 있다6). 『難經集註』에서 역시 “월인은 桑君의 비술을 전수받아, 의도에 통달하고 장부를 투시하여 장을 절제하고, 심장을 적출할 수 있게까지 이르렀다. 그 기술은 軒轅 때의 扁鵲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7)[2]이라 하여 진월인 역시 해부를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8). 또한, 『呂氏春秋』 「貴直論」에 ““商나라의 주왕은 걸어 다닌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려 그 골수를 보았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보았으며 비간(比干)을 죽여 그 심방을 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9), 漢代에는 “왕망이 적의의 무리였던 자가 체포되자 태의를 시켜 그를 해부하여 오장의 길이와 무게를 측정하게 하였고, 대나무를 혈맥을 따라 넣어 그 시작과 끝을 측정하여 ‘이것으로 병의 치법을 알 수 있다’하였다”[3]라 하여 왕망(王莽)이 해부를 명한 기록이 남아있다10).
이러한 기록은 단지 “해부를 시행했다는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인체에 대한 여러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실제로 해부를 하지 않았다면 알기 어려울 만큼 구체적인 내용들 역시 존재한다. 특히, 장기의 크기, 직경, 무게, 용량 등의 수치를 기록한 부분들이 그러하다. 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221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黃帝內經 靈樞』의 「平人絶穀」에서는 내장기의 크기(둘레), 직경, 길이, 용량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6,11). 이후 後漢時代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黃帝八十一難經』에서 역시 「平人絶穀」의 내용을 언급하며 『內經』에는 없는 五臟六腑의 계측 값에 대하여 보충하였는데 『內經』과 『難經』의 내용을 정리한 내용과 이를 당대 도량형으로 변환한 값은 Table 1과 같다.
Table 1 . 『內經』과 『難經』에서 五臟六腑의 계측 값과 변환값[6].
길이 | 둘레 | 직경 | 폭 | 용량 | 무게 | 위치 및 모양 | |
---|---|---|---|---|---|---|---|
간 | 二斤四兩 [7,8] (277.68 g) | 左三葉 右四葉 | |||||
심 | 精汁三合 (60 ml) | 十二兩 (167.04 g) | 七竅 三毛 | ||||
비 | 五寸 (11.55 cm) | 三寸 (6.93 cm) | 二斤二兩 (499.68 g) | ||||
폐 | 三斤三兩 (707.76 g) | 六葉兩耳 | |||||
신 | 一斤一兩 (235.92 g) | 兩枚 | |||||
담 | 三兩三銖 (43.5 g) | 肝之短葉間 | |||||
위 | 二尺六寸 (60.06 cm) | 一尺五寸 (34.65 cm) | 五寸 (11.55 cm) | 穀二斗 (4,000 ml) 水一斗五升 (3,000 ml) | 二斤二兩 (471.84 g) | ||
소장 | 三丈二尺 (739.2 cm) | 八分分之少半 (1.925 cm) | 二寸半 (5.775 cm) | 穀二斗四升 (4,800 ml) 水六升三合合之大半 (1,273.33 ml) | 二斤十四兩 (638.88 g) | 左回疊積十六曲 | |
대장 | 二丈一尺 (485.1 cm) | 一寸 (2.31 cm) | 四寸 (9.24 cm) | 穀一斗 (2,000 ml) 水七升半 (1,500 ml) | 二斤十二兩 (611.04 g) | 齊右回十六曲 | |
방광 | 九升九合 (1,980 ml) | 九兩二銖 (126.44 g) |
한편, 元代 朱震亨의 『格致餘論』에서는 “음양이 서로 얽혀 잉태되어 결합되면 그것이 저장되어지는 곳을 ‘자궁’이라 한다. 아래에 묶여진 한 줄기가 있고, 그것이 위로 갈라져 왼쪽, 오른쪽 각각 하나씩 달한다.”[4]라고 하여 자궁의 생김새를 정확하게 묘사하였다12). 明代 李梴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醫學入門』에서도 『存眞圖』와 『內照圖』의 해부학적 지식을 일부 수용 및 수정하여 『黃帝內經』의 五臟系 개념을 발전시켰다. 정혁상 등은 李梴이 실제로 해부에 관여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醫學入門』에 기술된 五臟系를 현대 해부학적으로 고찰한 결과 상당수의 系가 혈관계통(주로 동맥)을 관찰한 것으로 보이며, 그 외에도 기관 및 기관지, 인대, 장간막 등 다양한 구조물을 관찰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였다13).
한편, 우리나라에서 서양의학이 유입되기 전 해부를 시행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나타난다. 1559년 임언국의 『治腫秘方』 중 「背腫」에서는 직접 해부를 수행하였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심장의 뿌리는 5추 안에 매달려 있으니, 곧 (독맥 상) 피부에서 일 촌 떨어져 있을 따름이다.”14)[5]라 하여 심장의 정확한 해부학적 위치를 적시하였다15). 이익의 『星湖僿說』의 「五臟圖下」에 따르면, 의술에 밝은 전유형은 임진왜란때 길가에 있는 시체 3구를 해부하였고 그 방면에 더욱 정통해졌다는 것이 기록 되어있다. 다만 전유형은 유능한 의사로 기록이 전해졌지만 그의 해부학적 지식이 담긴 책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다16).
여러 의서를 찾아보면, 옛날에 외과 수술을 수행했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외과 수술을 수행한 경우는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로는 병이 臟腑에 있을 때 이를 직접 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진행한 기록이 있다. 『史記 扁鵲列傳』에는 “유부(俞跗)라는 의사가 탕액예쇄(湯液醴灑), 참석(鑱石), 교인(撟引), 안올독위(案扤毒熨) 등의 방법을 쓰지 않고 옷을 풀어 헤 쳐서 잠시 진찰해 보는 것만으로 질병의 징후를 보았고, 오장에 있는 수혈의 모양에 따라 피부를 가르고 살을 열어 막힌 맥을 통하게 하고 끊어진 힘줄을 잇고, 척수와 뇌수를 누르고, 고황과 격막을 바로하고, 장과 위를 깨끗이 씻어내고 오장도 씻었다.”17)[9]라 하여 외과적인 수술을 수행한 기록이 남아있다18). 화타 역시 “만약 병이 속에서 뭉치고 오래 되어 침을 놓는 것과 약을 쓰는 것으로 미칠 수 없어서, 마땅히 바로 수술을 해야 할 경우는 곧 그에게 마비산(麻痺散)을 마시게 하여, 잠시 후에 취해서 죽은 듯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게 되어서야 갈라서 수술했다. 만약 병이 내장 속에 있으면 곧 내장을 갈라 씻어 빨고, 배를 꿰맨 뒤 연고를 바르고 4-5일이면 나아서 아프지 않았으며, 환자도 느끼지 못해서 한 달이면 곧 평상시와 같이 회복되었다.”19)[10]라 하여 마취를 이용한 개복 수술을 진행한 기록이 남아있다20).
둘째로는 창상을 봉합하기 위하여 수술을 수행한 기록이 있다. 隨代 巢元方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諸病源候論』에는 “쇠붙이에 상하여 내장이 끊어졌을 때는 상처의 깊이에 따라 생사가 정해진다. 내장이 한쪽 끝만 보이면 이을 수 없다. 배가 아프고 숨이 짧으며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때 대장으로 인한 것이면 하루 반이 지나 죽고, 소장으로 인한 것이면 3일 만에 죽는다. 내장의 양끝이 보이면 급히 이을 수 있으니 먼저 바늘과 실로 꿰매어 잇는다. 내장이 끊어졌을 때는 닭 벼슬에서 나온 피를 끊어진 곳에 발라 기가 새지 않게 하고 밀어 넣는다. 내장이 나오기만 하고 끊어지지 않았을 때는 보리죽의 국물로 내장을 씻고 적셔서 넣는다.”21)[11]라 하여 창상으로 인해 내장이 끊어진 경우 이를 잇는 수술법을 소개하고 있다22). 또한, 元代 危亦林이 저술한 『世醫得效方』에서는 “창자와 뱃가죽이 터진 경우 마를 실로 만들거나 상백피를 실로 만들어 화예석산을 실 위에 바르고 안에서부터 꿰매어주고 창자에 청유를 발라 배 안으로 넣어준 후 피부를 꿰매는데 바깥 피부는 꿰매지 말고 열린 채로 두고 약을 발라 새살이 생기기를 기다려야 한다. 뱃가죽이 터져 창자와 장간막이 모두 나온 경우 먼저 활혈산이나 불수산과 같은 탕약을 먼저 복용케 하고 손을 써서 장간막을 뜯어버린다. 이는 쓸데없으므로 마음 놓고 없애도 된다. 그런 후에 창자를 안으로 넣은 후 실을 써서 봉합하고 이어 대소변이 잘 나가게 하는 약을 복용하여 대소변이 막히지않도록 한다.”23)[12]라 하여 내장이 찢어진 경우에 치료하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24).
셋째로는 인체 내부의 병리적인 물질을 배출하기 위하여 수술을 수행한 기록이 있다. 『東醫寶鑑』에서는 “나의 친척 부인이 나이 70에 유옹이 생겨 침도를 이용하여 외과치료를 하였더니...”[13]라 하여 침과 칼로 유옹을 치료한 경험을 기술한 『鍼灸資生經』의 내용을 인용하였다25). 또한, 『治腫指南』에서는 附骨疽를 치료할 때에 “부골저가 처음 생겨서 아플 때에는 그곳을 침으로 찢어내고 쇄골을 빼내어 모두 제거한다. 침으로 제거한 후...”[14]라 하여 침을 통해 인체 내부의 뼛조각을 먼저 빼내어야 함을 제시하였다26).
위와 같은 외과수술은 실제 인체 구조를 알지 못한다면 행할 수 없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 수준의 해부학적 지식이 당대에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또한 동시에 수술 시의 개복을 통한 실제 장기 및 조직의 관찰이 이루어져 해부에 관한 학문적 발전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체 해부의 결과를 도해하여 나타낸 그림 역시 여러 시대에 걸쳐 전해지고 있다. 중국 五代시대(907-960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煙蘿子內境圖』는 『正統道 藏・修眞十書・雜著捷徑』에 총 6폭이 수록되어 있다. 內境(內景, 內照)은 도교에서 血肉筋骨臟腑의 象이라고 하여 그 명칭이 인체 내부를 그렸음을 나타내고 있다. 煙蘿子內境圖에는 五臟, 泥丸, 丹田, 三魂, 三尸, 七魄, 臍, 羊車, 鹿車, 牛車 그리고 飮龜 등의 그림이 표현되어 있다. 6폭의 煙蘿圖의 해석으로는 김학동 등[15]과 성민규 등이 「內境正面之圖」, 「內境背面之圖」 가 해부학적 인체도와 가깝다고 평하였으며, 「內境左側之圖」, 「內境 右側之圖」 등의 나머지 4폭은 道敎와 관련이 있다 하였다27,28,30).
도교는 여러 수련 방법을 통해 神仙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神仙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곧 不老不死, 却病延年을 이루는 것이다. 도가들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활용하였는데, 체내의 精氣神을 돌보는 방법인 內丹도 그 중 한가지이다. 최초의 도교 경전이라고 평가받는 『太平經』에서는 『黃帝內經素問』 「宣明五氣論」편의 “五臟은 저장하고 있는 바, 心은 神을 저장하고, 肺는 魄를 저장하고, 肝은 魂을 저장하고, 脾는 意를 저장하고, 腎은 志를 저장한다. 이를 五臟所藏이라 한다.”[16]를 바탕으로 ‘五臟神’의 개념을 언급하며 도교적 수련방법과 五臟이라는 의학적 개념을 연결지었고29), 이러한 五臟神개념은 이후 魏晉시대 『黃庭經』에 이르러 五臟存思法[17] 등의 방법으로 더욱 확대, 발전되는 과정을 거치며 內丹術로써 자리잡게 되었다30).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도교에서는 內境圖를 작성함에 있어서 인체 내부의 五臟六腑와 도교적 수련을 위한 五臟神의 개념, 더 나아가 內丹術을 위한 개념까지도 반영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Fig. 1의 「內境正面之圖」, 「內境背面之圖」를 살펴보면 肝과 脾의 위치가 실제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한의학의 해부학이 실증적으로 이루어 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표현한 이유 역시 도가적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림에서 肝이 해부학적 위치(오른쪽)가 아닌 왼쪽에 표현한 것은 오행에 따른 위치(肝은 오행에서 木에 속하여 왼쪽)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는 內丹術, 五臟神의 개념과 이론적 설명을 위해 좌우를 바뀌게 표현한 것이다. 또한 「內境背面之圖」에 몸 중앙을 가로지르는 일직선의 관이 보이는데, 心에서 腎을 거쳐 精竅까지 연결하는 腎系를 나타낸 것으로, 이 장부도가 실제와는 다른 이론적 설명도 내포하고 있음을 뒷받침해준다5,31). 추가적으로 南宋代 『修眞十書』를 편찬한 石泰는 “肝은 木이다. 陰이 아직 물러나지 않고 탄식소리를 듣고 나오는 고로 왼쪽에서 치료하고 오른쪽에 위치한 것이다.”[18]라 하여 肝이 木의 속성을 가져 陰中之陽의 성질을 지녀 치료에서는 좌측으로 배치하였지만, 실제의 위치는 우측이라고 하였다. 즉 간의 위치를 고의적으로 실제와 다르게 그려진 것임을 첨언한 것인데, 이러한 사실은 단지 그림이 동양적 관점에서 그 기능과 성질을 표현하기 위하여 좌우를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 실제로는 장부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5,30).
北宋시대에 만들어진 해부도에는 『歐希範五臟圖』와 『存眞圖』가 있다. 『歐希範五臟圖』는 역적 歐希範과 그 무리를 진압하여 사형수인 이들을 해부하여 내장기를 도해한 결과물로 正面內向圖(前向面圖), 正背圖 (또는 正面圖), 背圖(背面圖), 心肺二臟之圖, 心氣圖, 氣海膈膜圖, 脾胃包系圖, 小腸膀胱蘭門圖, 命門大小腸膀胱之系圖의 9종 등으로 여러 판본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온다31). 『存眞圖』는 楊介가 『歐希範五臟圖』를 수정하고 『煙蘿子內境圖』를 증보 및 발전시킨 것이며 人臟正面圖, 人臟背面圖, 肺側圖, 心氣圖, 氣海膈膜圖, 脾 胃包系圖, 小腸膀胱蘭門圖, 命門大小腸膀胱之系圖의 8종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存眞圖』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후 元代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華佗先生內照圖』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5,28,31). 또한, 『煙蘿子內境圖』에서 바뀐 肝과 脾의 위치는 이후 『歐希範五臟圖』에서 肝과 脾의 모양은 그대로 둔 채로 이름만 바꾸어 위치만 바로잡았고, 『存眞圖』에서 肝과 脾의 위치에 모양까지 바꾸어 실제 해부학적 지식과 일치하도록 하였다31). 이기훈은 『歐希範五臟圖』와 『存眞圖』가 도교적 색채에서 탈피하고 해부학적 사실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후 『類經圖翼』 등에서 나타나는 후세 臟腑圖가 『存眞圖』를 기반으로 발전되었다고 평하였는데, 肝脾에 대한 내용을 수정한 점에서 그러한 면을 엿볼 수 있다고 사료된다32).
『華佗先生內照圖』는 『華佗先生玄門脈訣內照圖』라고도 하며(모두 이하 『內照圖』로 표기) 5-6세기에 漢代 華陀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내용에 宋代 『歐希範五臟圖』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華佗先生內照圖』는 元代에 완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內照圖』에서는 “黃帝書에 말하길 地氣의 통로는 嗌에 있으며 嗌咽이다. 藏象에서는 咽은 喉의 뒤에 있으니 고서가 옳고 구희범의 해장도가 틀리다.”[19]라 하여 “喉가 앞에 있고 咽이 뒤에 있다. 喉는 들이마시는 것을 主하고, 咽은 내뱉을 뿐이다.”[20]라 한 藏象(『煙蘿子內境圖』)의 표현이 옳고 歐本(『歐希範五臟圖』)의 표현이 틀리다고 지적하였다5,18).
또한 『內照圖』의 「人臟正面背面二圖」에서는 “송대의 화공 宋景이 구희범의 해부도를 그릴 때, 喉中에 구멍이 세 개라고 하였으나, 喉中에 구멍이 세 개 있다는 말은 옳지 않다.”[21]라 하여 『歐希範五臟圖』의 해부학적 오류를 지적하고 咽喉의 구조와 기능을 상세하게 후술하였다5).
즉, 장부도는 『煙蘿子內境圖』부터 출발하였으며 이후 후대 의가들의 관찰에 의해 오류를 수정하고 부족함을 보충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본 고에서는 한의학에서 인체를 해부하였다는 기록을 명시하여 한의학의 발전 과정에서 실증적 관찰이 배제되지 않았음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해부, 외과 수술, 장부도의 세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 기록을 중심으로 한국과 중국의 해부학사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서양의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생각되는 淸代부터는 고찰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우선, 중국에서는 정부에서 행해지는 공식적인 행정 절차로서 해부 시행에 관한 내용이 『黃帝內經』, 『呂氏春秋』, 왕망(王莽)의 기록 등에 존재한다. 또한 실제 해부를 시행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인체 내부 구조의 실측치와 모양에 대한 묘사와 같은 기록이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조선의 전유형이 임진왜란 때에 시체 3구를 해부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둘째로, 외과 수술에 관하여서는 장부에 병이 있을 때에 직접 개복 수술을 수행한 기록, 창상 수술 중 장기를 접합한 기록, 옹종 적출 등을 위해 침과 칼을 이용한 기록 등이 남아있다. 이러한 수술이 시행되었다는 것은 당대에 해부학적 지식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며, 동시에 수술 과정 중에서 획득하는 해부학적 지식을 통한 학문적 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인체 해부 결과를 도해한 臟腑圖는 『煙蘿子內境圖』로부터 『歐希範五臟圖』, 『存眞圖』, 『華佗先生內照圖』 등으로 이어져 왔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臟腑圖 역시 변화해 왔는데, 이 변화의 과정 중에는 前代의 오류를 수정하고 새로운 사실을 보충하는 발전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위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였을 때 한의학은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관찰과 함께 발전해온 학문이라고 사료된다.
해부학은 인체의 구조를 알고자 하는 목적에서 출발한 학문이다. 인체에서 발생하는 여러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병인을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인체의 구조와 생리를 탐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동양의학에서도 역시 해부를 시행하였으며, 이는 여러 의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기록을 살펴보면 해부는 왕이 해부를 명령하거나 이를 그림으로 남기도록 명하는 등 관(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식적인 행정 절차로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동양에서 해부가 갖는 의의가 작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백유상 등은 이러한 관에서 수행한 해부에 太醫가 참석했다는 기록(王莽傳)이 있는 것을 근거로 해부에 대한 지식이 수준 높은 지식이었을 것이며, 다수의 의사를 참여시켜 의학적 지식을 보급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아마 이러한 지식이 외과 수술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으로서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33).
그러나, 동양에서 해부가 발전한 경과는 서양과는 상이한 면이 있다. 서양은 인체를 기계적으로 바라보고 각 조직, 기관, 장기의 역할을 개별적으로 분석하는 방향으로 해부학을 발전시켰으며, 해부를 시행할 때에 해부 대상의 생사는 큰 의미가 없었다. 반면, 동양에서는 인체를 작은 단위로 분해하여 탐구하기보다는 하나의 전체로서 인식하였으며, 인체를 사후에 해부하여 그 구조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 그 구조를 生動하게 하는 역학관계(氣)에 중점을 더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4,10,18).
‘生動’을 중시하는 한의학의 이러한 특징은 해부 내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臟腑圖에서 두드러진다. 『煙蘿子內境圖』로부터 이어지는 臟腑圖는 인체 내부의 五臟六腑를 표현한 그림으로 주로 사지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사지말단이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는 서양의 인체도와 비교하면 주목할만한 차이이다. 한봉재에 따르면 이는 한의학이 생명활동의 중심을 장부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34). 또한, 『東醫寶鑑』의 身形臟腑圖에서는 복부의 율동을 주름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호흡하고 있는 모습, 즉 氣가 운행하고 있는 생체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Fig. 2)25,35).
다만, 사지말단이나 근육, 혈관, 신경 등에 관하여 상세하게 기술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비록 권중철 등은 십이경근이 肌腱과 주위 신경 조직을 구분하지 않고 동력원으로서 한꺼번에 기술하였다고 주장하며10), 정혁상 등은 醫學入門의 五臟系가 신경, 혈관, 장간막 등을 관찰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장하였으나13), 한의학에서의 해부학은 주로 장부 위주 해부에 편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 부위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은 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다만, 전신의 침구 치료혈을 위주로 발전한 外景圖인 明堂圖에 관하여 본 고에서는 논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며, 현대의 한의학에서는 오장육부 중심인 고유전통의 해부에서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뇌, 사지말단, 근골격계 등의 문제에도 보다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연구하여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Jongwon Woo: Conceptualization, Data curation, Formal analysis, Investigation, Writing - original draft
Soyoun Choi: Conceptualization, Data curation, Formal analysis, Investigation, Writing - original draft
Dong-yeon Kim: Conceptualization, Data curation, Formal analysis, Investigation
Heewon Yang: Conceptualization, Data curation, Formal analysis, Investigation
Donghyun Kim: Conceptualization, Data curation, Formal analysis, Supervision
Seonghyun Kwak: Formal analysis, Investigation, Supervision
Sungmin Kim: Formal analysis, Investigation, Supervision
Hagdong Kim: Writing - review & editing
The authors declare no conflict of interest.
Table 1 『內經』과 『難經』에서 五臟六腑의 계측 값과 변환값[6]
길이 | 둘레 | 직경 | 폭 | 용량 | 무게 | 위치 및 모양 | |
---|---|---|---|---|---|---|---|
간 | 二斤四兩 [7,8] (277.68 g) | 左三葉 右四葉 | |||||
심 | 精汁三合 (60 ml) | 十二兩 (167.04 g) | 七竅 三毛 | ||||
비 | 五寸 (11.55 cm) | 三寸 (6.93 cm) | 二斤二兩 (499.68 g) | ||||
폐 | 三斤三兩 (707.76 g) | 六葉兩耳 | |||||
신 | 一斤一兩 (235.92 g) | 兩枚 | |||||
담 | 三兩三銖 (43.5 g) | 肝之短葉間 | |||||
위 | 二尺六寸 (60.06 cm) | 一尺五寸 (34.65 cm) | 五寸 (11.55 cm) | 穀二斗 (4,000 ml) 水一斗五升 (3,000 ml) | 二斤二兩 (471.84 g) | ||
소장 | 三丈二尺 (739.2 cm) | 八分分之少半 (1.925 cm) | 二寸半 (5.775 cm) | 穀二斗四升 (4,800 ml) 水六升三合合之大半 (1,273.33 ml) | 二斤十四兩 (638.88 g) | 左回疊積十六曲 | |
대장 | 二丈一尺 (485.1 cm) | 一寸 (2.31 cm) | 四寸 (9.24 cm) | 穀一斗 (2,000 ml) 水七升半 (1,500 ml) | 二斤十二兩 (611.04 g) | 齊右回十六曲 | |
방광 | 九升九合 (1,980 ml) | 九兩二銖 (126.44 g) |
별표 1 春秋戰國時代와 後漢時代의 도량형 변환 기준
春秋戰國時代 | 後漢時代 | |
---|---|---|
길이 | 1尺≒23.1 cm | 1尺≒23.1 cm |
부피 | 1승≒202.15 ml | 1승≒200 ml |
무게 | 1斤≒250 g | 1兩≒16 g |
1斤≒222 g | 1兩≒13.92 g |